[2004년 6월 8일] 죽음의 숨결 앞에서

2004년 6월 8일 날씨: 더위는 나의 적

무심결에 일기를 쓰려 로그인 하는 순간,
짧게나마 어제 일기에 답글이 달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후후 익한이의 말을 듣자니, 괜시리 나 자신이 우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답글에 대한 답글을 달기도 달았었지만,
요즘 들어 생각없이 살아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지만서도
우울하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루하루가 행복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결단코,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아니다.
후후 물론 유익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판단이 들지는 않지만서도.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다들 바쁘게 여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러다 진짜 두뇌 회전이 멈추는 건 아닐까.

이왕 생각난 김에 적어둬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흐르면 곧내 잊어버리고 마는 아쉬운 내 기억력 탓에,
맘에 둔 생각을 간직하려고 하면 금새 그 본질이 변해버리거나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사람이… 죽음을 앞에 뒀을때 태연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아마 열에 아홉은 조금이나마 더 생명을 연장하려 하지 않을까.
아직 자기는 죽을 때가 아니라는 둥, 해야할 일이 많다는 둥.
핑계없는 무덤 없다고 이것저것 갖다 붙이면 산더미 같이 이유가 불어나지 않겠나.
나는 내 자신의 죽음에 대해 태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장담하지 않는다.
물론 죽음 앞에서 살려고 발버둥 치기도 싫은 것은 두말할나위도 없지만.
다만 언제 찾아올지 모를 죽음이라면, 그전에 미리 모든 것을 마무리하고 싶은데…
후후 비단 이런 생각은 나만의 것이 아닐테지만,
그리고 나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하게 인식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인간은 그래서 더욱더 미련 없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는 게 아닐까.

기사회생, 그리고 구사일생 두 사자성어는 비슷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풀이하자면 죽다가 살아난다는 뜻일텐데,
죽음의 문턱에서 흔히 표현하는 요단강이라든가 천국의 문 등 앞에서
다시금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느낌은 어떠할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 지는 알 수가 없지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 중요치는 않겠지만서도,
‘부활’ 이라는 표현이 정확하지 않을까.
새 삶을 살게 된 느낌이 어떠할까? 과연 예전의 과오를 모두 씻어내고,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변함없는 추한 인간으로 남아있을까.

늘 한결같다는 말을 왠지 좋아하게 되었다.
변한다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 모습 그대로 항상 간직한다는 게 왠지 끌리는 건 왜일까.
이미지 변신이라는 말을 달고 다니기는 하지만,
변함 없다는 말을 듣고 싶은 생각 또한.. 후후 변함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새로이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갈 거 같으면,
왜 이전부터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말이다.
죽었다 살아나서, 구원의 손길을 실제로 느꼈기 때문에?
하하 흔히 말하는 BS 이다.
죽을 위험에 쳐해야만 진실을 깨우친다면,
이 세상에 평화란 오히려 인류의 적이지 않을까.
모두들 허위와 거짓에 빠져서 살아가고 서로간에 피해를 입히며 진실을 모른 체 살아가는데.

길게 쓰다보니 두서도 없고 여기 빠졌다 저기 빠졌다,
사정없이 글의 문맥이 맞지 않아 껄끄럽긴 하다.
다만… 마음만은 편하니… 이 맛에 일기를 쓰는가. 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