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너는 너

제가 이원복 교수님을 좋아라 합니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어서가 아니고, “책에 길이 있다” 는 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해주신 작가분들 중 한분인지라 많이 좋아합니다. 🙂 한국에 있을 적에 구입했다가 지금까지 고이 모셔두고 있는 책들 중 대다수가 이원복 교수님이 만화로 그리신 책들이거든요. 글로 읽으면 지루해질만한 내용들을 만화로 받아들이기 쉽게 그리셨기에 애장하는 책들입니다.

근 15년 전에 출간되었던 ‘자본주의 공산주의’의 도입부에 보면, 자본주의는 “나는 나, 너는 너” 라는 것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을 통해서 자본주의에 대해서 파헤쳐 보자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냥 단순하게 개인주의적인 면에서 보는 고찰이라고 할까요? 사실 철학을 전공으로 한 것이 아니라서 아주 심도 있는 내용을 다룰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생각많은 공돌이의 끄적임이라 치부해버리셔도 될것 같습니다. (웃음)

은근 슬쩍 웃음으로 무마해보려 해도, 숨길 수가 없는 것이 있다면… 본 글은 굉장히 글의 톤이 냉소적이게 될겁니다. 아직 글을 시작하지도 않았건만, 제가 이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제가 머릿속에 담아둔 생각들만 곰곰히 따져봐도 쉽게 단정 지을 수가 있거든요. 따라서 제가 처방한 ‘red pill’을 원치 않으시는 분은 글 읽기를 여기서 중단하시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Remember, all I’m offering is the truth. Nothing.

현실 != 사실

적어도 제게 있어서 현실이란 사실이 아닙니다. 현실이나 사실이나 그 말이 그 말이 아니냐고 하시겠지만, 사실이란 단어가 객관적인 느낌을 준다면 현실은 지극히 주관적이랄까요. 개똥철학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걸요.

우선 ‘내’가 인지하고 있는 현실과 ‘네’가 인지하고 있는 현실은 엄연히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부분적으로나마 동의’하는 현실이 있을 지언정, ‘나’와 ‘너’는 다른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겁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현실’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만큼 유동적인 것이 현실입니다. 시시각각 바뀔 수 있는 것이 현실이에요.

아니오. 다른 차원에 산다든가 하는 과학적인 이론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트릭스처럼 가상의 세계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논하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단순하게, ‘내’가 말하는 현실은 ‘네’가 말하는 현실과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소리를 낸다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고 말하는 것 등 오감을 전부 활용한 복합적인 개념을 말하는 겁니다.

사실 = 도화지, 현실 = 수채화

수채화가 싫다고 하시면 다른 어떤 기법이라도 좋습니다. 도화지가 싫다고 하시면 어떤 종이라도 좋습니다. 아니 종이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요지는 사실이라는 바탕위에 현실이라는 그림을 그리는 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시각이 반영된 그림. 타인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모두가 다른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음은 당연한거 아니겠어요. 덕분에 현실이란 수채화는 상대적인 평가가 불가피합니다. 모두가 승자일 수는 없어요. 어느 한쪽이 뛰어나면 다른 한쪽은 떨어지거나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게 현실이잖아요.

우습게도 진짜 수채화처럼, 현실도 덧칠이 가능합니다. 완성이 되었든 미완성이던 그림에 작업을 하는 것이든, 덧칠은 때로는 좋은 그리고 때로는 나쁜 결과를 불러옵니다. 평화로웠던 현실을 아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고, 불행했던 현실을 평온하게 바꿔버릴 수도 있어요. 비록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말이에요. 그만큼 현실은 다양하면서 동시에 일정합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아무리 다양하게 살아간다고 한들, 결국에는 얽히고 섥혀서 일정한 틀에 사로 잡힐 수 밖에 없거든요.

멀리도 멀리 돌아왔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를 논하기 위해서 현실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개똥철학까지 꺼내 들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누구에게나 현실은 다르다’ 라는 저만의 정의를 이해하셨으면 이제 반만 남은 겁니다.

나의 아픔은 너의 것

조금 이기적인것 같지만, 자신의 아픔을 남에게 떠넘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단순하게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 식의 사탕발림이 아니라, 진짜로 떠넘길 수 있게 된다면 말이에요. 하지만 정작 현실은 다릅니다. 나의 아픔은 내 것이지 절대 ‘너’의 것이 될 수가 없어요. 누군가에게 ‘내’가 맞았다면 ‘내’가 아픈 것이지 ‘네’가 아픈 건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이 아프다구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저도 아픕니다.

실은 바라 보고 있는 현실이 다르기에, 제 아픔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혼자서 슬퍼스 뒹군다고 해서 누군가가 그 슬픔을 100% 그대로 느낄 수가 없다는 거에요. 사람 관계라는 것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 너는 너” 말예요. 다같이 신나게 놀다가도, 돌아서면 각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주위 사람과 나눌 수도 있지만, 결국 홀로 침대에서 베개에 눈물을 적시우며 흐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아픔은 자기 것이고, 결국 스스로가 이겨낼 수 밖에 없거든요. 남에게 덜렁 떠 넘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나는 나, 너는 너

홀로서기. 저는 홀로서기라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용기가 있어서 그리고 가진게 많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하기를 원해서 입니다. 물론 항상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전 완벽하지 않거든요. 실수를 할때도 있고,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남에게 의존하는 것을 먼저 생각하진 않습니다. 누군가를 업을 지언정, 편히 업힌체로 살아가긴 싫거든요.

그래서인지,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끔은 냉정한 편입니다. 인정할 만큼은 인정해 주고, 동시에 인정받길 원하는 부분을 인정 받자는 것이 제 생각이거든요. 잘해줄 때는 한없이 잘 해주다가도, 제 개인적인 영역이 관련되어 있을 때는 한없이 냉정해집니다. 여기 까지라는 선을 긋는다고 해야 할까요. 대신에 내가 싫어하기에 되도록이면 상대방에게도 안할려고 노력합니다. 역지사지라잖아요.

냉정한 세상, 메마른 세상

지구 반대쪽에서 수십, 수백, 또는 수천명이 기아에 죽어나가고 있어도, 다른 한쪽에서는 음식쓰레기로 산을 쌓는 것이 현실입니다. 고가의 운동화나 구두를 사면서 가격이 높음을 탓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신발들을 만들기 위해서 공장에서 밤낮으로 일하는 직공들의 월급이 얼마나 될련지 신경쓰지 않습니다. 길거리를 걷다가도 자연보호가 어찌되었든, 환경미화가 어찌되었든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남의 편의는 어찌되었든 자기만 편하면 대수이고, 자신의 이익이 최우선되는 것을 마냥 바라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무더위, 가뭄 그리고 기아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편하게 노래를 들으면서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있는 제 자신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뿌린대로 거둔다. 가진만큼 먹고 산다는 주장이 결국 제가 이제껏 증명하고 싶었던 부분입니다. 바로 “나는 나, 너는 너”를 우리 모두가 실천하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아니, 그 누구도 옳다 그르다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현실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덕분에 동시에 모두에게 다르게 와닿는 것이 현실이거든요. 수돗물이 걱정되어서 생수를 사먹는 것이 현실이고, 동시에 매일같이 스프링클러에서 소비되는 수돗물 조차 없어서 목마름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누가 뭐라 한들, 지구는 돌아갑니다. 조막만한 땅덩어리가 억단위에 팔리든, 노동자가 공장에서 크게 다쳐서 생계 연명에 큰 어려움이 생기든, 수백만의 때묻지 않은 새 생명이 탄생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는 돌아갑니다. 그게 현실이거든요.

ps.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고, 천천히 마무리 지으면서 느끼는 겁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장문의 글에는 재능이 없나 봅니다. 애초에 좀더 양질의 글을 작성하고 싶었지만, 역시 글은 쓰질 않으면 늘지 않나 봅니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는 왠만해선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가끔씩 이렇게 냉소적인 글을 쓰면 기분이 울적해집니다. 울적해질 글을 애초에 왜 쓰냐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실을 직시해야지,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진 않거든요.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하는데, 아주 즐기지는 못하겠고 가끔 이렇게 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6 Replies to “나는 나, 너는 너”

  1. 멋진글같은데 잠이쏟아져서 도져히못읽겠어요
    일단자고 내일 재대로읽고 댓글다시달게요^^
    죄송합니다

    1. 제가 직접 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죄송하다는 댓글까지야… 제가 더 송구스럽죠. 😛
      글 자체는… 크게 의미가 있는 글이 아니니, 괜히 애쓰실 필요 없어요. 피곤하실땐 잠이 최고죠. 😀

  2. 좋은글읽엇습니다 ^^
    냉소적으로 자기자신을 바라보는건 저도 생각해본적이없네요
    언제나 자기자신 비판적 으로 여기고 삼는것만 해본것같아요

    가끔식 이렇게 정의해보면어떨까요?

    세상은 사회는 현실은
    모두 공유하고있고
    그공유를 거부하고 독단으로만 여긴다
    사람과 소통을 스스로 거북해한다
    사회의 구성요소나 일원
    그 메마른세상에 약자인 장애인이나 굶주리는
    사람을 나라서 너라서
    여기기떄문에 선이 더 분명해지지않을까..
    꼭 한방맞아서 아픈멍이나 상처 기분을
    나누거나 나눠야 한다고생각하지않아요
    현실은 쌍방향이아닌 언제나 흘러만 가니
    냉소적 이기보다는 언제나 웃고(나자신을위해서
    이득을위해서가아닌) 배려하고(유세나가식이아닌 나의긍지)이상적으로 (이상적인걸 단편적으로 보지않았으면해요)살려고 노력합니다 ^^

    결론:너무 비관적으로 자식을 학대만하지마시라구요^^

    1. 🙂 댓글 감사합니다.
      스스로를 학대하지만은 않아요. 이 세상 모두를 비판하고 동시에 저 또한 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뿐이거든요. 솔직히 비판적이고 냉소적으로 하루 하루를 살면 몸과 마음이 지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끔은 밝은 면도 바라보면서 살아야죠. 😀

      대신에 절대 ‘비현실적’으로 세상을 살아서는 안되겠죠. 항상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공존하는 것이 현실이잖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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